이번 시간에는 옥저와 동예, 삼한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2019/06/06 - [분류 전체보기] - 구석기시대
2019/06/07 - [분류 전체보기] - 신석기시대
동해안의 옥조와 동예
중국 지린성 지역에서 부여와 고구려가 성장할 무렵, 한반도의 동해안 지역에서는 옥저와 동예가 발전하고 있었다. 옥저는 함경도의 동해안 지역에, 동예는 강원도 북부의 동해안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옥저와 동예에는 왕의 칭호를 사용하는 강력한 지배자가 없었고, 읍군, 삼로라고 불리는 군장들이 백성들을 다스렸다. 부여와 고구려에 비해 발전이 늦어 일찍부터 낙랑군과 고구려의 간섭을 받았으며, 결국 뒤에는 모두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옥저는 일찍이 고구려에 복속되어 소금, 생선, 해초류 등의 해산물과 특산물을 바쳤다. 또 어린 여자를 데려와 기른 후에 며느리로 삼는 민며느리제 라는 독특한 혼인 풍습이 있었다. 가족이 죽으면 시체를 임시로 매장하였다가 나중에 그 뼈를 추려서 가족 공동 무덤에 안치하였다.
동예는 단궁이라는 활과 과하마라는 작은말, 바다표범 가죽인 반어피가 특산물로 유명하였다. 해마다 10월 무천이라는 제천행사를 열었고, 같은 씨족끼리 혼인하지 않는 족외혼 풍습이 있었다.
읍락마다 관할하는 산과 내가 별도로 있었고, 다른 읍락의 사람이 그곳을 함부로 침범하면 소와 말, 노비를 물게 하는 책화라는 제도가 있었다.
이렇게 이번 시간에는 옥저와 동예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삼한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부여의 건국
철기의 보급 이후 늦어도 기원전 2세기 초반에 중국 지린성 쑹화강 유역이 넓은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부여가 등장하였다.
부여의 건국신화에 따르면 북이 탁리 국왕의 시녀가 햇빛에 감응되어 알을 낳았고, 거기에서 태어난 동명이 남쪽으로 달아나 부여를 건국하였다고 한다.
2019/06/07 - [분류 전체보기] - 신석기시대
2019/06/11 - [분류 전체보기] - 청동기시대
초기 부여는 왕권이 미약하여 흉년이 들면 왕이 교체되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부여는 기원 후 1세기부터 중국과 교류하며 왕권이 강화되어, 왕이 죽으면 많을 때는 한꺼번에 100여 명에 달하는 사람을 순장하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부여는 세력을 확장하여 2천여 리의 영토를 차지하고 가호 수가 8만에 이르렀다.
그러나 3세기 말 주변 민족의 침략을 받아 부여는 북부여와 동부여로 분열되었다. 두만강 유역에 위치했던 동부여는 광개토대왕대에 고구려에 병합되었고, 쑹화강 유역에 위치했던 북부여는 이후 줄곧 고구려의 간섭을 받다가 494년에 고구려에 완전히 병합되었다.
비록 부여는 중앙집권 국가로 성장하지 못하고 연맹체 단계에서 멸망하였으나 부여의 역사와 전통은 고구려와 백제에 계승되었다.
부여의 사회풍습
부여는 농업과 목축이 주요 산업이어서 관직의 이름도 가축의 이름을 따서 우가, 마가. 저가. 구가하고 하였다. 이 밖에 대사자, 사자라는 관직이 있었다. 우가 등은 왕성에서 지방으로 향하는 도로 근처에 위치한 수천 또는 수백 가로 이루어진 읍락을 다스리며 중앙정치에 참여하였다.
왕은 중국 지린성 지린시의 동단산과 용담산 일대에 위치한 왕성을 직접 통치하면서 여러 가와 협의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부여는 그 외곽에 읍루를 복속 집단으로 두고, 무거운 부세를 부과하였다.
부여의 읍락에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호민과 평민, 하호, 노비가 있었다. 하호는 경제적으로 열약하여 노비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 전쟁이 일어나면 제가 가 몸소 전투를 하고 하호는 양식을 져다 음식을 만들어 줄 뿐이었다. 형벌은 엄격하여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다. 도둑질을 하면 도둑질한 물건의 12배를 변상하게 하였다. 그리고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부인은 사형에 처하였다.
매년 12월에 영고라는 제천행사를 개최했는데, 이때 부여 사람들은 하늘에 제사를 지냈고, 노래 부르며 춤추고 즐겼으며, 재판을 열어 죄수를 풀어 주기도 하였다. 이밖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소를 죽여 그 발굽으로 길흉을 점쳤고,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삼는 풍습이 있었다. 영고와 더불어 이러한 풍습은 유목과 수렵 사회의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이렇게 이번 시간에는 부여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옥저와 동예, 삼한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고조선의 두 번째 시간으로 위만의 집권가 멸망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2019/06/05 - [분류 전체보기] - 인류의 출현과 진화
2019/06/11 - [분류 전체보기] - 청동기시대
위만의 집권과 멸망
기원전 5~4세기에 전국시대라는 중국의 혼란기를 틈타 많은 사람이 고조선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에 의하여 고조선에 철기가 전래되었다. 이후 고조선은 청동기와 철기를 바탕으로 성장하여 기원전 4~3세기에 그 지배자가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였다. 이 무렵 대부와 같은 관료를 두었으며, 군사적으로 중국의 연과 대결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고조선은 연의 장수 진개의 침력을 받아 서쪽의 넓은 영토를 잃고, 중심지를 대동강 유역에 위치한 왕험성으로 옮겼다.
기원전 3세기 말에서 2세기 초 사이의 진한 교체기에 다시 많은 사람이 고조선으로 이주하여 왔다.
이 가운데 한 사람이 위만으로, 한에서 연왕으로 임명한 노관이 흉노로 망명하자, 무리 1천여 명을 이끌고 고조선에 망명하였다.
위만은 기원전 194년에 준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했는데, 이후의 고조선을 흔히 위만조선이라고 부른다.
위만에게 쫓겨난 준왕은 남쪽으로 도망하여 한왕이 되어 한족 사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위만조선은 비파형 동검을 발전시킨 세형동검 및 우수한 철제무기로 주변의 임둔과 진번을 정복해 복속시키고, 남쪽의 진국과 한과의 중계무역을 통하여 세력을 키워 나갔다.
한나라는 건국 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적극적인 대외팽창을 추진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고조선은 흉노와의 연합을 모색하여 한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한 무제는 대군을 보내 고조선을 공격했는데, 고조선은 위만의 손자 우거왕을 중심으로 1년 동안 완강하게 버티다가 결국 한에 의해 멸망하였다. (기원전 108)
한나라는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그 옛 땅에 낙랑, 진번, 임둔, 현도 등 이른바 한사군을 설치하여 지배하였다. 한사군 가운데 낙랑군은 400여 년 동안 존속하며 우리나라의 통합을 방해하였으나, 중국의 선진 문물을 전해 주어 삼국의 성립과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이렇게 이번 시간에는 위만의 집권과 멸망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부여의 건국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고조선의 건국과 발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2019/06/11 - [분류 전체보기] - 청동기시대
2019/06/06 - [분류 전체보기] - 구석기시대
건국과 성장
청동기시대에 요동과 한반도에는 예족과 맥족, 한족이 살았다.
예족과 맥족이 살던 요동과 한반도 서북 지역에서 기원전 10~7세기 비파형 동검과 공인돌,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여러 군장 사회를 통합한 국가 조선이 등장하였다. 이것을 후대의 조선과 구별하여 고조선이라고 부른다.
[삼국유사] 등에 전하는 단군신화에 따르면 기원전 2333년에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우리나의 역사가 중국 못지않게 오래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설정한 건국연대이다.
단군의 고조선 건국 사실과 홍익인간의 건국이념은 우리나라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자긍심을 일깨워 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현재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를 평양 일대로 보는 견해와 중국 랴오닝성 일대로 보는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중국 동북부 랴오허 유역에서 비파형 동검이 다수 발견되고, 고인돌과 미송리식 토기가 널리 분포했음이 확인되므로 초기의 중심지는 랴오둥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
고조선은 건국 이후 예족과 맥족의 여러 군장을 정복하여 세력을 떨쳤다. 초기 고조선의 세력 범위는 비파형 동검과 탁자식 고인돌, 미송리식 토기와 팽이형 토기의 분포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는데, 대체로 랴오허 동쪽의 중국 동북 지방과 한반도 서북 지역을 망라하는 것이 확인된다.
중국의 역사책인 [관자] 에 산둥 반도에 위치한 중국의 제나라가 조선과 짐승 가죽을 교역하였다고 전하여 일찍이 고조선이 중국에서 선진문물을 수용했음을 알려 준다.
이렇게 이번 시간에는 고조선의 건국과 발전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위만의 집권과 멸망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청동기 시대의 군장에 등장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2019/06/05 - [분류 전체보기] - 한국사의 시작
2019/06/07 - [분류 전체보기] - 신석기시대
농업이 경제생활의 중심을 이루면서 곡물의 파종과 재배, 수확을 위해서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한 곳에 정착하며 노동력을 집약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청동기시대에 대규모 취락이 등장하고 정주 기간도 이전보다 훨씬 길어졌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주로 해안가나 강가의 저지대에 취락을 조성하였으나,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저지대를 밭이나 논으로 일구고 하천을 끼고 있는 야산이나 구릉 지대에 취락을 조성하였다.
청동기시 대인들은 청동기를 사용하여 목제와 석제 농기구를 더욱 날카롭고 정교하게 만들어 농사에 활용하였다. 이와 더불어 벼농사의 보급으로 농업 생산이 증대되었다. 그리하여 부족 내부의 가족 사이에 빈부 격차가 벌어졌을 뿐만 아니라 청동기를 만드는 장인, 전사, 상인 등이 등장하여 사회 분화가 진전되었다.
농업 생산의 증대로 인구가 증가하면서 경작지나 거주지를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보편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씨족 또는 부족, 취락과 취락 사이에 경쟁과 갈등, 전쟁이 일상화되었고, 울주 검단리와 부여 송국리, 진주 대평리를 비롯한 여려 지역에서 환호(물웅덩이)와 목책 (나무 울타리) 같은 방어시설을 갖춘 대규모 취락지가 등장하였다. 청동기시대의 마을 안에는 높은 곳에서 망을 보는 망루, 공동작업장과 집회소, 공공의식 장소, 창고, 주거시설 등 다양한 용도와 크기의 움집이 분포하였다.
전쟁이 잦아짐에 따라 큰 규모의 취락을 중심으로 인근의 작은 취락을 결속하여 서열화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이와 더불어 우세한 부족이 주변의 약한 부족을 정복하여 복합적인 사회구조를 갖춘 정치체가 등장하였다. 이러한 정치체를 다스리는 지배자를 군장이라고 부른다.
중국 요동과 한반도에서는 군장이 죽으면, 그이 권위를 상징하는 거대한 고인돌이나 돌널무덤을 만들어 비파형 동검을 비롯한 다양한 껴묻거리를 함께 묻었다. 고인돌은 한반도와 랴오둥 반도, 일본 규슈지역에 분포한다. 이 밖에 청동기시대에는 움무덤과 독무덤을 만들어 죽은 이를 매장하였다.
이렇게 이번 시간에는 군장의 등장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고조선의 건국과 발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청동기시대의 경제생활의 변화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2019/06/06 - [분류 전체보기] - 구석기시대
2019/06/07 - [분류 전체보기] -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에도 신석기시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수렵과 어로, 채집으로 식량을 획득하였으나 경제생활의 중심은 농업이었다. 청동기시대에는 밭에서 보리, 밀, 콩, 기장, 조, 수수 등 다양한 잡곡을 재배하였다.
대전 괴정동에서 발견된 농경문화 청동기에 한 사람이 나무로 만든 따비로 가지런한 고랑과 이랑이 있는 직사각형의 밭을 갈고, 나무로 만든 괭이로 땅을 파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진주 대평리에서는 고랑과 이랑이 남아 있는 청동기시대의 밭이 발견되었다.
이때부터 한반도에서는 본격적으로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부여 송국리를 비롯한 청동기시대의 여러 유적에서 불에 탄 쌀과 볍씨 자국 토기가 발견되었다. 논산 마전리와 울산 무거동에서는 청동기시대의 논이 확인되었다. 논은 작은 하천이나 계곡의 물을 막는 보와 같은 간단한 관개시설을 설치하여 물을 공급할 수 있는 골짜기에다 사각형 또는 불규칙한 모양으로 만들었다. 벼를 수확할 때 널리 사용한 도구가 반달돌칼이다.
청동기시대에 벼농사가 널리 보급되었으나 생산경제에서 벼농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높은 펴은 아니었다. 청동기시대의 주식은 밭에서 재배한 조와 기장, 보리, 밀, 콩 등이었고, 쌀은 잡곡을 보완하는 역할에 머물렀다. 이 밖에 도토리와 같은 견과류 등을 채집하여 먹었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풍요로운 생활을 기원하기 위해 바위 면에 그림을 그렸는데, 울주 반구대와 고령 장기리 알터 바위그림이 유명하다. 울주 반구대 바위에는 고래와 호랑이, 멧돼지 등 200여 점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고령 장기리 알터 바위에는 동심원, 십자형, 삼각형 등의 기하학무늬를 그렸다. 사람들은 동물 그림과 더불어 동심원, 삼각형 등의 기하학무늬를 바위에 그려 사냥과 고기잡이의 성공, 농사에서 풍요로운 수확을 빌었다.
이렇게 이번 시간에는 경제생활의 변화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군장의 등장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청동기시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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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동기의 전래와 보급
인류가 처음으로 금속기의 재료를 사용한 것은 구리였다. 그런데 구리는 너무 물러 점차 주석과 아연을 섞어 단단한 청동 도구를 만들어 썼다.
지금으로부터, 5,500년 전에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처음으로 청동기를 사용하였다. 중국에서는 4,500년 전쯤에 청동기를 사용하고 정치조직을 갖춘 초기 국가들이 등장하였다.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 중국 랴오둥 지역에 , 3,300년 전 무렵에는 한반도에 청동기가 전래되었다. 일찍이 문명이 발달한 지역에서는 무기와 제사 용구, 농기구, 그리고 다양한 생활도구를 청동기로 만들었으나, 중국 랴오둥과 한반도에서는 재료가 충분하지 않고 만들기도 어려워 주로 지배층의 무기나 장식품을 청동기로 제작하였다.
대표적인 청동기가 칼날 모양이 악기 비파 모양을 닮은 비파형 동검이다. 비파형 동검은 중국 동북부의 랴오닝성과 지린성에서 두루 발견되고, 랴오둥 지방의 비파형 동검이 전래되어 청천강 이북 지역과 충청. 전라도 지역에서 주로 출토된다.
비파형 동검과 함께 청동 도끼와 끌, 창, 화살촉이 도구와 무기로 사용되었고, 청동 단추와 방울, 거친 무늬 거울 등을 장식품이나 제사용 구로 만들었다. 또한 간석기로 만든검과 화살촉이 널리 쓰였다. 농기구를 비롯한 생활도구는 여전히 돌이나 나무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었다.
비파형 동검은 기원전 4세기 무렵부터 칼날 모양이 더욱 세련되고 날이 좁은 세형동검으로 발전하였다. 비파형 동검은 위세품의 성격이 강했으나 세형동검은 무기로 널리 사용되었다. 세형동검은 한반도 청천강 이남지역에서 주로 발견되어
한국식 동검이라고도 부른다. 세형동검은 철기와 함께 발견되는 사례가 많기 때문에 세형동검을 사용하던 시기를 초기 철기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청동기시대에는 밑바닥이 납작하고 무늬가 없는 민무늬토기가 주로 사용되었다. 중국 랴오 등과 한반도 서북 지역에는 항아리 모양의 미송리식 토기와 팽이형 토기가 분포하고, 한반도 남부지역에서는 각 지역에 따라 모양이 다른 토기가 분포한다. 특히 청동기시대 후기에 밑이 납작하고 긴 달걀형의 몸체를 가진 송국리식 토기가 충청과 전라, 경상도 지역에 널리 보급되었다. 초기 철기시대에는 민무늬토기 이외에도 입술 부분에 덧띠를 붙인 토기, 검은간토기 등을 사용하였다.
이번 시간에는 청동기의 전래와 보급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경제생활의 변화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신석기시대의 종교와 신앙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2019/06/05 - [분류 전체보기] - 한국사의 시작
2019/06/06 - [분류 전체보기] -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자연에 의존하여 살았기 때문에 자연의 섭리에 관심이 많았다.
그들은 인간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해, 달, 강, 산, 동물, 큰 나무 등에 영혼이 있다고 믿었는데, 이를 애니미즘이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풍요로운 생산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그중에서도 태양과 물의 숭배가 으뜸이었다.
또한 신석기시대에 사슴, 곰 들의 짐승을 씨족이나 부족의 조상 또는 수호신과 연결시켜 숭배하는 토테미즘도 있었고, 살람이 죽어도 영혼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영혼 숭배와 조상 숭배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이러한 원시 신앙을 바탕으로 다양한 예술품을 만들었다. 흙으로 빚은 얼굴 모습, 동물 모양의 조각품, 조개껍데기 가면, 조가비 또는 짐승이 뼈나 이빨로 만든 치레 걸이 등이 여러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신석기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무덤을 만들어 매장하였다. 신석기시대의 여러 유적에서 독무덤과 움무덤이 발견되었다.
울진 후포리에서는 40여 명 이상의 뼈를 묻은 무덤구덩이가 발견되었는데, 다른 곳에 시신을 묻었다가 뼈만 따로 추려서 다시 묻은 것이었다.
여기에서 마치 사람 뼈를 덮듯이 깔려 있는 돌도끼가 상당히 많이 발견되어 신석기시대에도 장례의식을 치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이번 시간에는 신석기시대의 종교와 신앙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청동기시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