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의 건국
철기의 보급 이후 늦어도 기원전 2세기 초반에 중국 지린성 쑹화강 유역이 넓은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부여가 등장하였다.
부여의 건국신화에 따르면 북이 탁리 국왕의 시녀가 햇빛에 감응되어 알을 낳았고, 거기에서 태어난 동명이 남쪽으로 달아나 부여를 건국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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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부여는 왕권이 미약하여 흉년이 들면 왕이 교체되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부여는 기원 후 1세기부터 중국과 교류하며 왕권이 강화되어, 왕이 죽으면 많을 때는 한꺼번에 100여 명에 달하는 사람을 순장하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부여는 세력을 확장하여 2천여 리의 영토를 차지하고 가호 수가 8만에 이르렀다.
그러나 3세기 말 주변 민족의 침략을 받아 부여는 북부여와 동부여로 분열되었다. 두만강 유역에 위치했던 동부여는 광개토대왕대에 고구려에 병합되었고, 쑹화강 유역에 위치했던 북부여는 이후 줄곧 고구려의 간섭을 받다가 494년에 고구려에 완전히 병합되었다.
비록 부여는 중앙집권 국가로 성장하지 못하고 연맹체 단계에서 멸망하였으나 부여의 역사와 전통은 고구려와 백제에 계승되었다.
부여의 사회풍습
부여는 농업과 목축이 주요 산업이어서 관직의 이름도 가축의 이름을 따서 우가, 마가. 저가. 구가하고 하였다. 이 밖에 대사자, 사자라는 관직이 있었다. 우가 등은 왕성에서 지방으로 향하는 도로 근처에 위치한 수천 또는 수백 가로 이루어진 읍락을 다스리며 중앙정치에 참여하였다.
왕은 중국 지린성 지린시의 동단산과 용담산 일대에 위치한 왕성을 직접 통치하면서 여러 가와 협의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부여는 그 외곽에 읍루를 복속 집단으로 두고, 무거운 부세를 부과하였다.
부여의 읍락에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호민과 평민, 하호, 노비가 있었다. 하호는 경제적으로 열약하여 노비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 전쟁이 일어나면 제가 가 몸소 전투를 하고 하호는 양식을 져다 음식을 만들어 줄 뿐이었다. 형벌은 엄격하여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다. 도둑질을 하면 도둑질한 물건의 12배를 변상하게 하였다. 그리고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부인은 사형에 처하였다.
매년 12월에 영고라는 제천행사를 개최했는데, 이때 부여 사람들은 하늘에 제사를 지냈고, 노래 부르며 춤추고 즐겼으며, 재판을 열어 죄수를 풀어 주기도 하였다. 이밖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소를 죽여 그 발굽으로 길흉을 점쳤고,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삼는 풍습이 있었다. 영고와 더불어 이러한 풍습은 유목과 수렵 사회의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이렇게 이번 시간에는 부여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옥저와 동예, 삼한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